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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초반과 후반이 굉장히 다른 소설이었다. 초반에는 꽤나 고증을 살린듯한 중세 묘사와 급박한 전개로 마치 대체 역사물을 읽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특히 중세풍 갑옷을 입는 묘사에서는 그냥 플레이트 아머 정도로 퉁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조사를 많이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후반에는 가벼운 분위기의 시트콤적인 분위기로 굉장히 분위기가 달랐다. 뭐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장르가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특이했다.

'고난이 없는 주인공'이라고 할 정도로 무난하게 진행되는 흐름도 특징적이었다. 다른 소설들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성장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끝날때까지 별다른 위기 없이 술술 진행된다. 덕분에 피 튀기는 전투 장면에서도 긴박함이 아니라 일상 물을 보는듯한 신기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고구마 먹은 기분, 하차지점이 별로 없었다.

로우 파워 판타지를 처음 봤는데 다른 소설이라면 시원하게 광역마법으로 쓸어 담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이곳의 마법사는 작은 마법 하나에도 대가와 준비과정이 필요했고 마법보다는 여러 지식들을 활용해 상황을 모면했다. 마법사보다는 연금술사 같은 느낌? 성기사도 정말 멸악선포, 홀리 라이트 같은 거창한 스킬들을 쓰는 아니라 정말 광신으로 무장해 좀 더 잘 싸우는 일반 기사라는 점도 특이했다. 교단도 기적이나 특수한 마법이 아니라 특유의 종교적 권력이 좀 더 부각되는 면도 있었고 여러모로 신비한 마법이 아닌 투박한 창칼이 난무하는 로우 파워 판타지의 느낌이었다. 

글은 잘 써보지 않는 편이라 뭐라 자세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방랑기사는 글을 상당히 잘 썼다. 내용이 막힘없이 술술 읽히며 빠르게 읽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웹소설에는 이러한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솜씨와는 별개로 스토리 구성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캐릭터는 하나하나 매력있고 흥미롭게 만들어졌다. 말더듬이 백작, 키큰 엘프 이젤리아, 어리숙한 뱀수인 마법사 쟈니나 등등 입체적이진 않지만 특이해서 캐릭터성이 기억에 남는 캐릭터들이 많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소설을 계속 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주인공이 모든 걸 해결하는 분위기가 너무 강해서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들의 성장이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초반에 어리숙해서 놀림받던 캐릭터라도 중후반부에는 성장해서 명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초반에 나온 캐릭터는 끝날 때 까지도 비슷한 포지션을 유지한다. 대표적으로 쟈니나가 있다. 드디어 뭔가 하나?? 싶으면 안돼서 주인공이 도와주고 그러면 시무룩해져서 개그 하고.. 끝날 때까지 이러한 패턴의 반복이었다.

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진행 특성상 새로운 캐릭터들이 대거 출현하는데 대체 나온 건지 모르겠는 조연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름 떡밥을 뿌리려다가 급하게 마무리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필로그 없이 끝나버려서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대표적으로 노예병은 잊을만하면 나와서 언젠가 얘네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하고 후반부에는 노예장을 맡은 두 조연들이 추가로 등장하면서 기대를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한 게 없이 끝나버렸고, 악령이 조종하는 교황은 뭔가 있을 것 같더니 스리슬쩍 잊혔으며, 유배당한 술탄의 후궁은 정말 아무 역할한 것 없이 잡혔다 풀려났다. 그냥 없었어도 진행에 아무 변화가 없었을 것 같은데 왜 등장했는지 모를, 쓸데없는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많았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동료들이나 주변인물들은 점점 늘어가는데 이쯤 되면 누군가 죽거나 그럴듯한 이유로 리타이어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다 때려 부수는 방향으로 일들이 해결되다 보니 나중엔 주변 인물들이 너무 많아져서 스리슬쩍 어느 순간부터 언급이 아예 안 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았다. 초반에 비중 있게 나왔다가 후반부에 합류한 조셉이 대표적인 예였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어서 초반에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지만 중후반부만 되어도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였다. 사건이 일어나면 주인공이 행동하고 주변사람들은 착각하고 결국 주인공이 힘으로 때려 부수고 잠깐의 개그가 나온 뒤 다음 사건이 이어지고..

비중있는 악역의 허무한 죽음도 너무 반복적이었다. 에피소드 하나에서 잠깐 나오고 말 소악당들은 살아서 주인공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다음 사건으로의 발판 역할이라도 했지만, 비중 있는 메인 악역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이 모르는 사이에 제삼자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전개를 후반부로 다가갈수록 너무 많이 썼다. 말 나눌 새도 없이 부하의 칼에 맞아 죽은 백국 백작, 똑같이 부하가 바로 찔러 죽인 술탄의 총독, 죽인 줄도 몰랐던 술탄 본인까지 허무한 죽음은 한두 번 나올 법도 하지만 꽤나 비중 있는 인물들이 죄다 이렇게 가는 걸로 봐서는 이후 스토리를 어떻게 풀지 막막해서 죽인 거 아닌가?라는 의심도 들었다.

결말이 너무 번갯불에 콩볶듯 나서 아쉬운 마음에 이런저런 불만사항들을 쓰기는 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시원하게 주인공이 쓸어버리는 중세풍 시트콤을 원한다면 난 방랑기사를 읽어보라고 추천할 것 같다.